세종특강

[창업과 기업가정신 1] 박도봉 알루코그룹 회장 “출발은 미약해도 된다. 목표를 향해 힘차게 일하라”
2017-08-01 hit 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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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도봉 대표가 강연을 진행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생산 및 현장직은 대다수가 기피하는 직무다. 종사자 처우가 열악할 뿐더러 사무직과의 차별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현장직을 '노가다'로 보는 주변 시선을 극복하는 것도 쉽지 않다.


30여년 전 어느 중소기업의 생산직으로 사회에 첫 발을 뗐던 청년은 오늘날 연매출 1조 원을 올리는 기업을 이끌고 있다. 박도봉 알루코그룹 대표의 이야기다. 박 대표는 지난 5월 24일 ‘창업과 기업가정신’의 연사로 발걸음 했다.


박 대표는 본격적인 강연에 앞서 “현재 자리에 서기까지 지난 삶을 여러분께 소개하려고 한다. 나의 경험들을 여러분만의 가치와 꿈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큰돈은 모두가 가지 않는 길에 있다


박도봉 대표는 충북 금산, 시골 농부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자랐다. 이후 은행원의 꿈을 안고 대전상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당시 은행원은 안정된 직업 중 하나로 손꼽혔기에 많은 학생들이 상고로 진학하는 분위기였고, 박 대표도 그 중 하나였다.


“주변의 권고로 안정된 직업을 좇았다. 그러나 안정된 직장 속에서 머무르는 삶에 대해서 깊은 회의를 느꼈다. 남자로 태어나 보다 큰 꿈을 품어야겠다고 생각했고, 고등학교 2학년 시절 상장기업의 대표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박 대표는 고등학교 3학년 시절 대학진학반을 거쳐 목원대에 입학했다. 상장기업의 대표가 되겠다는 꿈은 여전히 가슴에 남아 있었지만, 안정적인 직장을 바라는 부모님의 바람을 뿌리치기 어려워 교사가 되기 위한 과정을 밟기도 했다. 그러나 박 대표에게 교사는 맞지 않는 옷이었다. 교생 자격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니 자신의 길이 아니라고 여기게 됐다. 결국 교사자격증을 내팽개쳤고, 본래의 큰 꿈을 위해 상경하여 대학원에 진학하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박 대표의 부모님은 강하게 반대했다. 장남이 교사 자격증을 내팽개치고 대학원 진학을 한다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상경한 박 대표는 대학원을 다니면서 당시 장래가 밝다고 소문난 공인중개사 자격증 공부도 병행했다. “뭐 하나라도 걸리기만 해라” 하는 심경으로 여기저기 손을 댔다. 그러나 이내 회의가 들었다. 자격증을 대량으로 주는 분위기라 실속이 없었고 “대학원 생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하는 회의가 들었다. 창업하겠다는 결심은 있었지만 막상 현장에 뛰어들자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마침 박 대표의 대학원 동기 가운데 열처리 공장의 사장을 하고 있는 이가 있었다. 그는 “요즘 젊은 사람들은 편한 일만 찾으려고 한다. 돈은 절대 그런 곳에 있지 않다. 모두가 가지 않는 길로 가야 큰돈을 벌 수가 있다. 금속제련, 열처리 같은 기반사업만큼 돈 벌기에 좋은 곳이 없다”고 말했다.  


▲ 세종대학교 학생들이 강연을 경청하고 있다.


대학 동기의 말은 박 대표가 열처리 분야에 발을 들여 놓게 된 계기가 됐다.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박 대표는 대학원 생활을 접고 산업현장에 뛰어들기로 결심하여 영등포 문래동의 어느 열처리 회사로 향했다. 그리고 생산직으로 근무했다. 아침 저녁으로 1년을 그렇게 하고나니 10년을 근무했던 기능공보다 못할 게 하나도 없었다. 열정과 애사심을 가지고 하다보니, 어느새 중급 기능장이 돼있었다. 


봉급은 박했다. 한 달 15만 원을 받아가며 견뎠다. 그러나 낙담하지 않았다. 박 대표는 “나는 이 일로 머무르는 것이 아닌 상장회사의 대표가 되기 위해 연마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며 “육체적으로 고통스러웠지만 행복했다”고 회고했다.

 

생산직으로 1년이 넘어가는 시기에 그를 눈여겨본 영업부장이 영업직을 제안해왔다. 창업에 영업능력은 필수였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박 대표는 성실하게 임했고, 영업직으로 바꾼 지 1년 만에 열처리 업계에서 실적 1등을 차지했다. 


“내가 괄목할만한 성과를 냈던 이유는 단 하나,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업의 대표가 되어야 한다는 목표만 가지고 정진했다. 어느덧 중급의 프로야구 선수 정도의 연봉을 주겠다는 제안이 다른 회사로부터 오기도 했다.”


아내한테 자랑하니, “그거 하려고 이 고생을 했냐?”며 오히려 질책을 받았다. 이윽고 박 대표는 미련없이 회사를 나왔다. 단지 직장을 잡고 밥 먹고 잘 살려고 기름밥 먹어가며 영업까지 뛴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박 대표는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도전해보자”며 본격적으로 창업에 뛰어들었다. 


창업을 하겠다며 무턱대고 회사를 나왔지만 ‘돈’이 문제였다. 공장을 차릴 돈도 사무실을 낼 돈도 없었다. 아내가 씀씀이를 아끼고 아껴서 모은 종잣돈 600만 원이 전부였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박 대표는 “고민을 거듭하다가 ‘창업을 제조업처럼 직접 만들어서 인정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하는 의문이 생겼고, 결국 유통업을 기반으로 한 창업을 생각해냈다“고 밝혔다. 유일한 직원은 부인이었다. 부인이 물량을 수주 받으면, 박 대표는 눈과 비를 아랑곳 않고 물량을 공급했다. 이렇게 3개월을 하니 엄청난 위치에 와있었다.

 

이후 박 대표는 부천에서 3개월 만에 자신의 공장을 세웠다. 직원 20여 명, 창업에 뛰어든지 4~5년 만에 월 7~8천만 원을 벌었다. 당시 목동의 32평 아파트 가격이 9천만 원인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액수였다. 박 대표는 그렇게 성장했다. 지금 그가 이끌고 있는 (주)알루코 그룹의 직원은 국내 천여 명, 해외 5천여 명에 달한다.


▲ 박 대표와 교양학부 김희정 교수가 대담하고 있다.


먹물 냄새는 자랑이 아니다


박도봉 대표의 창업 성공의 열쇠는 직접 발로 뛰며 현장에서 쌓은 경험에 있었다. 그는 “먹물냄새는 자랑이 아니다. 오직 현장에서 흘린 땀이 성공을 보장해준다. 남들이 다 가는 길은 경쟁만 치열하지 남는 게 없다.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택하고 현장에서 땀을 흘려라. 기발한 발상, 창조적인 발상은 현장을 뛰는 발과 미래를 겨냥하는 머리가 만들어낸다”며 현장 경험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현재 우리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청년취업난이다. 요즘 대학생들은 취업이 안되면 졸업하지 않고 1~2년을 미루는 경우도 다반사다. 박 대표는 이 문제에 대해서 “당시 우리 시절에도 그랬다. 그러나 처음 출발은 미약하게 시작해도 된다. 앞으로 올라갈 일만이 남기 때문이다. 유예기간을 마냥 늘리지 말고 현장에 뛰어들어 힘차게 일해보라. 미래의 기업가는 적극적으로 매달리는 사람들 가운데서 나온다”고 말했다.


박 대표는 취업에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스펙으로 어학능력과 인성을 꼽았다. 특히 어학능력은 “그 사람의 성실성을 나타내 준다고 생각한다“며 ”어디에 취업을 하든지 어학능력은 필수다“라고 강조했다. 


박도봉 대표는 마지막으로 청년들의 미래 목표와 꿈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강연을 마무리했다. 


“요즘 60세는 청년, 90세는 장년이라고 한다.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라. 눈높이를 낮추되 큰 꿈을 향해 정진하라. 대기업 임원이 되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는 것과 같다. 조그만 중소기업에서 열심히 하여 기술을 배우면 이후 창업하거나 그 회사의 주역이 될 수 있다. 여러분만의 꿈과 희망으로 여러분만의 색깔을 내라.”



취재 및 글 | 최상관 홍보기자(sapsalcat@naver.com)